소금항아리/읽은 시

[진란] 불멸의 새가 울다 外

뿌리기픈나무 2013. 4. 7. 08:37

불멸의 새가 울다

 

                     진 란

 

 

언어의 새들이

붉은 심장 속에 둥지를 틀다

관념의 깃털을 뽑아 깔고

그 위에 씨알을 품었다

쓸쓸한 귀를 열고

이름 없는 시인의 가슴으로 드러간 밤

어지러운 선잠에 들려 올려지는 새벽,

어디선가는 푸른 환청이 들렸다

 

꽃- 피 - 요 꽃 - 피- 요

 

 

혼자 노는 숲

 

 

꽃들이 앞 다투어 피고 지고

그렇게 후닥닥 지나갔다

항상 가던 그 자리를 다시 걸어가며

산목련 함박 웃는 모습을 보렸더니

그새 지고 없어, 아차 늦었구나 아쉬운데

어디서 하얀 종소리 뎅뎅뎅 밀려온다

금천"길 푸른 숲 사이로 때죽거리며 조랑거리는 것들

조그만 은종들이 찰랑찰랑 온몸에 불을 켜고 흔들어 댄다

순간 왁자해지는 숲, 찌르르, 찌이익, 쫑쫑거리는 새소리들

금천 물길에 부서져 반짝이는 초여름의 햇살, 고요를 섞는

바람, 나를 들여다보는 초록 눈들이

환생하듯 일제히 일어서는 천 년 비룡처럼

혼자 노는 숲에 혼자인 것은 아무것도 없다

그럼에도 숲에는 많은 것들이 혼자였다

내가 없어도 항상 그 자리에 있는 것들

 

고맙다

 

 

산토끼똥의 철학적 고찰

 

 

오래오래 울리는 이런 생각,

존재란 그런 것이다 가령

너와 내가 한 몸이라고 생각한 동안만

우리라는 울타리에 갇히는 것

관계란 그런 것이다 가령

너와 내가 사랑하고 미워하는 동안만

우리라는 벽에 서로를 가두는 것

교감이란 그런 것이다 가령

너와 내가 사랑하고 있었다고 믿는 동안

일어나는 무성의 울림 같은 것

그런 것들이 다 떠나고 오랜 후에는

맨숭맨숭, 지나가는 저 그림자만큼도 아닌

 

텅 빈 들판

 

 

가을, 누가 지나갔다

 

 

 

숲을 열고 들어간다

숲을 밀고 걸어간다

숲을 흔들며 서 있는 바람

숲의 가슴에는 온전히 숨이다

숲을 가득 들이쉬니 나뭇잎의 숨이 향긋하다

익숙한 냄새, 킁킁거리며 한참 누구였을까 생각하였다

그대 품에서 나던 나뭇잎 냄새가 금새도

이 숲에 스며들었었구나

개똥지빠귀 한 마리 씨이익 울며

숲 위로 하늘을 물고 날아갔다

어떤 손이 저리도 뜨겁게 흔드는지

숲이 메여 출렁, 목울대를 밀고 들어섰다

거미줄을 가르며, 누군가 지나갔다

붉은 것들이 함성을 지르며 화르륵 번졌다

숲을 밀고 누군가, 누가 지나갔다

 

 

시월의 풍경

 

 

외로운 그대가 서서 바라보는 그곳은 먼,

우리가 아직 닿지 못한 곳

즐거운 내가 누워서 꿈꾸는 그곳은 가까운,

우리를 쓸어 간 바람 같은 것

그대와 내가 기다리는 것은 여기, 혹은 저기에

나비거나 꽃잎으로 팔랑팔랑 흩날리는

귀울림 깊어지는 늦봄 뻐꾸기같이

 

 

새들에 대한 오해

 

 

새들의 본적은 잘못 적혔다

새가 평생 허공을 나는 건 아니다

먹이를 구하기 위한 비감이거나

살기 위해 아슬한 허공으로 오르는 것이다

 

새들에게 모든 길이 열려진 것은 아니다

몸에 새겨진 오랜 습성으로 길을 떠나는 것

위험을 경계하고 길을 내는 사냥터일 뿐

날개없는 생각으로 새들을 자유롭다고 하지 말자

땅을 딛고 나무에 내리고 바위에 둥지를 틀고

수풀 속 은신처로 보호 구역을 만드는 일

생을 위해 혹은 새끼를 위해 날마다

절실함으로 날아오르는, 새일 뿐이라는 것

 

누가 새의 본적을 하늘이라고 했는가

순명에 귀 기울이는 것들만 비로소 하늘로 간다

온 생을 다한 것들이 단 한번 날아

하늘로 간다는 것을 들은 적이 있다

 

 

개망초 2

 

묻어야 할 것이 얼마나 많길래

망초라 했을까

무성한 꽃대들의 손짓 너머로

실족한 남자가 휘뚝휘뚝 걸어간다

어쩔 수 없었던 허방

마음껏 뻗을 수 없었던 걸음이 주춤거린다

남루한 목숨으로 모질게 남아

묵정지에 와서 망부가로 피는구나

한때는 젊음과 열정의 카르패디엠,

치열하던 노선도 놓아버리고

서울역 광장이며 지하에 피어난 무심한 꽃들

어쩌면 우리네 남편이었을

아니, 우리 아이들의 아비였을

저 하얀 소금꽃

지천으로 피어나는 백귀들

 

 

그리운 귀

 

가끔 시가 안된다는 말을

사람이 덜되었다는 말로 듣는다

더러는 사람이 덜되었다는 말을

욕심 없이 무지렁이 같다는 말로 듣는다

그래도 밝히면 꿈틀할걸?

아하 그건 본능적이야

본능적이라는 말 왜

말초적으로 반응하난다는 말로 들릴까

제 듣고 싶은 말을 들으면

후벼 파고 싶을 만큼 가렵고

제 듣기 싫은 말을 들으면

온 신경이 곤두서서 전사가 된다

그리운 귀 고高 귀 貴는 어디에 있는지

 

 

겨울, 나비

 

어디로 갔을까 그 많은 나비들

겨울을 어쩌고 봄 오면 너울거리며

날아오는 것일까

둥근 꿈으로 고치를 짓고 동면하는 것인가?
수없이 보던 자연 다큐멘터리나

아이들 자연 백과사전에서는 잘 알 것 같은데

이 사소한 곳에서 막막해지다니

나비가 순간 동안거에 드는 것일까

햇살 고른 마루에서 꿈을 꾸는 것일까

-이웃집 나비가 나야웅 하품을 한다-

그 나비가 환한 봄날에

나비를 희롱하는 꿈을 꾸는 것인지

꿈의 그 나비가 고양이 등으로 들어가 버린 것인지

 

사라졌다

그리고 또 나타나고

어느 날 갑자기 다 어디로 가 버리고

 

 

거미줄

 

자주 다니는 푸나무에 집을 지었지

사람들의 발길에 채여 구겨지길래

다시 허공에 이쪽과 저쪽을 연결하여

촘촘하게 끈끈하게 얼기설기 엮었지

 

파닥거리는 것들, 파닥거릴수록 더욱 수렁에 빠진

함정처럼, 빠져나가려고 수단을 쓸수록 옭아지는

의뭉한 늪처럼, 몇 겹의, 몇 겁의 내 사랑

 

마침내, 당신과 나를 이 그물에서 걷어낸 손은

더 큰 하늘, 우리가 미처 볼 수 없었던 힘

오늘, 스산한 바람에 벌레 울음만 걸려드는

온 힘을 다하여 촘촘하고 끈끈하게 짰던 그 그물

홀로 흩어지고 홀로 흩날리고 있네

 

 

진란시집 <혼자 노는 숲>