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금항아리/좋은 수필

잠 簪

뿌리기픈나무 2013. 4. 19. 12:07

잠 (비녀)

 

문혜란 (수필가)

 

머리 부분이 떨어져 나간 비녀는 부러진 놋젓가락을 딺았다.

오래 손끝에 닳아 반질반질하다. 일평생 하루같이 매만졌으니

길이인들 줄지 않았으랴.

당신의 오그라든 몸을 돌려 안고 바투 앉았다. 베개에 눌린 머

리카락을 손가락으로 간추려 얼레빗으로 애벌 빗고 참빗으로

두벌 세벌 빗어 내린다. 빗살 사이에 낀 머리카락이 쉽게 내려가

지 않는다. 달비 장수가 탐을 내며 따라다니던 삼단 같던 머리는

풀물 빠진 모시 올로 변했다. 자주색 공단 댕기 물려 쪽을 찌면,

떨잠 하나 꽂지 않아도 꽃봉오리로 피어나던 낭자머리다.

시장에서 실용 비녀가 사라진 지 오래다. 특별 주문으로 백동

비녀 하나 간신히 구했다. 새 비녀로 어머니의 쪽을 쪄 본다. 손

가락 사이로 자꾸만 흘러내린다. 내 솜씨가 어설퍼서만은 아니

다. 당신의 닳아 빠져나간 세월만큼 머리카락이 빠져나간 탓이

다. 비녀를 넘겨받은 당신의 손놀림은 거울을 보지 않고도 한 치

어긋남이 없다. 신정에서 정수리까지 반듯한 앞가르마는 가르

지 않아도 갈라져 있다. 비스듬히 눕힌 참빗과 손바락으로 번갈

아 쓸어 넘기더니 실타래를 놉 삼아 쪽을 고정한다. 머리카락 한

올 흘러내리지 않는다.

상투를 고정하는 것이 동곳이라면 쪽을 고정시키는 것은 비

녀다. 사극에서 쪽을 찐 옛 여인들을 자주 보지만 제대로가 아니

다. 비녀는 헐렁하거나 비뚤게 꽂지 말아야 한다. 머리카락 뿌리

가 보이도록 껑충하게 올라가면 상스럽고, 머리카락 뿌리보다

뿌리 중앙에 고정되어야 단아하고 곱다. 한복 맵시를 가장 잘 살

리는 머리 모양이며 쪽을 찌는 솜씨로도 아낙의 품위를 가늠할

수 있었다.

말뚝을 닮은 동곳이 남성의 힘을 상징한다면 여성의 비녀는

기혼의 표시이며 한 남자에게 소속됨을 상징한다. 비녀의 한쪽

끝은 반구형이다. 꼭 틀어 맨 쪽머리가 미끄러지지 않게 만든 걸

림 컥이다. 한일자로 가로질러 단단히 잠근 형태가 대문의 빗장

과도 닮았다. 반대쪽은 뾰족하다. 위험이 닥쳤을 때 호신의 무기

로 사용하여 부덕과 정절을 지키라는 암시가 숨어 있다.

열여섯에 머리 올린 당신은 구순이 넘도록 비녀를 꽂았다. 머

리가 단정해야 마음이 단정하다며 아침에 일어나면 제일 먼저 세

수하고 머리를 빗어 쪽을 매만졌다. 금비녀는 무거워서, 은비녀

는 쉽게 휜다고 잠시 짧고 단단한 동비녀만 고집해 왔다. 지아비가 세

상 떴을 때는 잠시 목비녀를 꽂았다. 미망 未亡의 표시다. 정절의

표징으로 치렁한 검은 머리 한 줌 베어 지아비의 관속에 넣었다.

당신은 비녀 머리를 변절하지 않는 사랑의 언약으로 생각하신 듯하다.

요즘 세대들이 쉽게 사랑하고 쉽게 이별하는 것은 정

절과 금욕의 상징인 비녀가 사라진 탓이라는 주장이다. 머리에

빗장이 없어지듯 마음에 빗장을 없애 버려서 사랑의 뿌리가 깊

지 못하다는 뜻이다.

조선 시대의 열녀에게는 왕실에서 열녀문과 함께 매죽잠 簪을

내렸다. 품행이 단정하다고 내린 상賞이지만 훼절을 막기 위한

굴레가 아니었을까 싶어 연민을 갖게 된다. 집안 또는 문중을 위

해 희생을 감수해야 했을 미망의 여인들, 세상 법도라는 게 홀로

된 여인에게 유독 지엄한 시대였으니 말이다. 거기에 맞추어 여

성의 본령을 굳건하게 지켜 온 조선의 여인들이 애잔하다. 비녀

의 내력을 조곤조곤 들려주는 당신의 목소리엔 힘이 실리는데,

나는 비녀에서 엄숙한 슬픔을 본다.

"머리카락 건사하기도 힘든데 인제 그만 자르고 파마합시다. "

"아이구 안 돼야. "

에멤무지로 해 본 말에 대답은 단호하시다.

"니 아부지가 날 볼라보마 아짤라꼬."

지아비 떠나보낸 지 반세기. 망백의 연치까지 한 번도 자르지

않았던 쪽 머리의 고집이 지아비와 천상 재회를 위한 것이었

을까? 윗목에 던져 놓은 부러진 비녀와빗살 빠진 참빗을 한지

로 꼭꼭 여민다. 당신이 지아비 곁으로 가시는 날 머리맡에 고이

놓아 드리리.

'소금항아리 > 좋은 수필' 카테고리의 다른 글

[스크랩] 그것이 그것에게 _ 바보 나무  (1) 2010.11.29
나이 드는 일  (0) 2010.01.28
[스크랩] 꼭 읽어야 할 한국명수필 111선  (0) 2009.09.04
석류-한흑구  (0) 2009.09.03
특급품- 김소운  (0) 2009.09.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