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금항아리/좋은 수필

나이 드는 일

뿌리기픈나무 2010. 1. 28. 01:30

<오정희의 내 마음의 무늬>

 

연휴를 맞아 집에 다니러 왔다가 서울로 돌아가는 자식들을 역까지 바래다주고 오는 길인데 그들고 ㅏ함께 역으로 나오면서 보았던 김양옆의 화사한 코스모스 꽃  빛깔이 그 잠깐 사이에 조금 어둡게 스르죽어 시든 듯 했다. 마음 탓일게다. 그 잠깐 사이이건만 자식들을 보내고 빈 차로 돌아오는 길에 눈에 닿은 풍경은 그들과 함께 일때와는 다르기 마련이다. 빈 차라니! 엄연히 남편과 내가 타고 있는 자식들만 빠져나갔을 뿐인데도 그 빈자리고 온통 차 안을 점령해서 빈 차라고 서슴없이 말하는 것이다. 오래전 저녁밥을 지으면서 이청준 선생의 (눈길)이란 소설을 읽다가 소설 속의 어머니가 이른 새벽, 먼 길 떠나는 어린 아들을 차부까지 배웅하고 그 길을 되짚어 혼자 돌아오는 길에 그때까지 눈길에 그대로 오목오목 찍혀 남아 있는 어린 아들의 발자국을 보며 눈물 짓는 대목에서 나 역시 걷잡을 수 없는 눈물바람을 하느라 밥을 다 태웠던 기억이 불현듯 떠올라 눈시울이 뜨거워지고 가슴이 싸해진다.

조금 전까지 자식들과 이런저런 얘기를 주고받고 농담도 나누며, 웃던 남편과 나는 둘 다 누가 입을 봉해버리기도 한 양 말이 없다. 오래 함께 살아온 두 사람 사이의 침묵이란 그리 불편하거나 어색할 일도 아니건만 나는 왠지 대화를 나눠야 할 필요성을 느끼며 가까스로 화제가 될만 한 것을 찾는다.

"이젠 정말 가을이 깊어지네요."

"그렇군"

궁색하게 입을 뗀 말에 남편이 크게 고개를 끄덕인다.

"세월이 참 빨라요."

"정말 그래. 정신을 차릴 수 없어."

대답하느 그의 표정이 심각하다고 하리만치 진지해서 슬며서 웃음이 나온다.

간신히 꺼낸 짧고 무심한 대화에서 보이닌, 어울리지 않게 진지하고 커다란 반응에서, 나느 이 순간 우리가 서로에게 다정해지고 친절해져야 한다는 책음을 느끼고 있다는 것을 감지한다. 그래, 우리는 빈둥지의 쓸쓸함과 나이 들어가는 일의 스산함, 서로의 늙어가는 모습을 바라보는 서글픔에 따뜻이 위로하고 위로 받고 싶은 것이다. 열쇠로 문을 따고 들어서는 집이 어딘가 휑하고 낯설다. 그럴리가 없는데도 얼핏얼핏 아들과 딸의 모습이 어른대고 목소리들도 들리는 듯하다. 자식들이 지블 떠난 지 오래되어 이젠 간혹 다니러 오거나 할 뿐인 생활이 익숙해질 만도 하건만 그들이 떠난 뒤의 이런 마음, 기분은 좀체 면역이 되지 않는다. 나는 괜히 분주한 몸짓으로 자식들이 보다 펼쳐 둔 책들을 제자리에 꽂고 옷가지들을 세탁기에 넣는 등 남긴 자취들을 치우고, 남편은 별반 보는 기색도 없으면서 티브이를 이리저리 채널을 돌리다가 하릴없이 창밖으로 시선을 주기도 한다. 그 역시 이 볕밝고 아름다운 가을날 오후를 단순하고 즐겁게 받아들이거나 일을 하기에는 뭔가 허전하고 스산한 그늘이 마음에 드리워져 있는 것이다. 침묵으로 이엉지는 햇빛 있는 동안의 오후 시간은 아쉽도록 짧으면서도 정체 모를 막연한 불안감과 초조감 때문에 무엇을 해야할지 몰라 지루하게 흘러간다.

어린아이와 젊은이들이 없는 집에서 일찍 어둠이 찾아든다. 어둠이라는 물리적 현상과 적막감이라는 심리적 상태가 어우러져 빚어내는 빛깔로 집은 깊게 가라앉는다. 전등불을 켜고 낮에 자식들과 함께 먹고 남긴 음식들을 다시 데워 점심상과 다름업슨 밥상을 차려 저녁을 먹는다. 솜씨를 부려 장만했던 음식들은 가짓수도 많고 정성 들인것이건만 뜨겁게 데웠어도 갓 만들었을때의 화려한 볼품과 향기도 훈기도 찾아 볼 수 없다. 가족이 둘러앉은 식탁의 풍성함과 행복감과 미각들이 사라진 단지, 한끼니의 밥"을 먹는다. 묵묵히 숟갈질을 하며 남편과 나는 무언의 대화를 나눈다. 앞을 보고 달려가기 바쁜 자식들의 발목을 잡으면 안된다거니, 어떤 경우에도 평상심을 잃지 ㅇ낳고 살아야 한다거니, 이런 쓸쓸함과 적막감을 당연하고 자연스레 받아들여야 한다거니....

어릴 때 밖에서 마음 상할 일이나 언쨚은 일을 당하고 들어오면 어머니가 하시던, 즉 한잠 푹자고 나면 낫는다던 말씀은 늙어가는 지금에게도 유효하다. 잠치 최상의

명약이다. 전에 없이 일찍 불을 끄고 잠자리에 든다.

이런저런 생각에 ㄷ ㅟ척이다 설핏 들었던 잠인데 누군가 가만가만 흔들어 깨우는 듯 눈이 떠진다. 보름 갓 지난 달빛이 방 안 가득 밀려들어와 있다. 고른 숨소리를 내며 잠든 남편의 얼굴을 무연히 바라본다. 근 삼십년을 보아온 잠든 얼굴은 깊이 주름지고 무구하고 친숙하고, 그래서 가슴 아프다. 청년에서 중년으로 다시 노년으로 접어드는 세월을 함께 아이를 낳고 기르며 애증과 고락을 나누며 살아왔다는 것이 불가해진 신비로 느껴지기도 한다. 자연의 섭리, 생명 가진 것들의 질서에 충실하고 후손을 낳고 떠나보내고 순하게 소멸해가는 것이 기쁘고 고마운 일이라는 생각도 해본다.

다시 잠들기 어려워 내 방으로 건너와 버릇처럼 노트며 책 따위를 뒤처기다가 일본 시인 토미오카다에코의 시를 다시 읽는다. 시인 신 현림씨가 어느 책자에 소개한 시를 옮겨 적어 놓았던 것이다.

 

당신이 홍차를 끓이고

나는 빵을 굽겠지요.

그렇게 살아가노라면

때로는 어느 초저녁

붉게 물든 달이 떠오르는 것을 보고서야

그것으로 그뿐, 이제 이곳에는 더 오지 않을 걸

우리들은 덧문을 내리고 문을 걸고

홍차를 끓이고 빵을 굽고

아무튼 당신이 나를

내가 당신을

마당에 묻어줄 날이 있을 거라고

언제나 그렇게 이야기 하며

평소처럼 먹을 것을 찾으로 가게 되겠지요

당신이 아니면 내가

나를 아니면 당신을

마당에 묻어 줄 때가 마침내 있게 되고

남은 한 사람이 홍차를 홀짝홀짝 마시면서

그때야 비롯 ㅗ 이야기는 끝나게 되겠지요.

당신의 자유도 바보들이나 하는 이야기 같은 것이 되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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