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급품 - 김소운
비자는 연하고 탄력이 있어 두세 판국을 두고 나면 반면(盤面)이 얽어서 곰보같이 된다. 얼마 동안을 그냥 내버려두면 반면은 다시 본디대로 평평해진다.
이것이 비자반의 특징이다 비자를 반재(盤材)로 진중(珍重)하게 여기는 소이(所以)는, 오로지 이 유연성(柔軟性)을 취함이다. 반면에 돌이 닿을 때의 연한 감촉---, 비자반이면 여느 바둑판보다 어깨가 마치지 않는다는 것이다. 아무리 흑단(黑檀)이나 자단(紫檀)이 귀목(貴木)이라고 해도 이런 것으로 바둑판을 만들지는 않는다.
비자반 일등품 위에 또 한층 뛰어 특급품이란 것이 있다. 반재며, 치수며, 연륜이며 어느 점이 일급과 다르다는 것은 아니나, 반면에 머리카락 같은 가느다란 흉터가 보이면 이게 특급품이다. 알기 쉽게 값으로 따지자면, 전전(戰前) 시세로 일급이 2천 원 전후인데, 특급은 2천 4, 5백 원, 상처가 있어서 값이 내리기는커녕 오히려 비싸진다는 데 진진(津津)한 묘미가 있다.
반면이 갈라진다는 것은 기약치 않은 불측(不測)의 사고이다. 사고란 어느 때 어느 경우에도 별로 환영할 것이 못 된다. 그 균열(龜裂)의 성질 여하에 따라서는 일급품 바둑판이 목침(木枕)감으로 전락해 버릴 수도 있다. 그러나 그렇게 큰 균열이 아니고 회생할 여지가 있을 정도라면 헝겊으로 싸고 뚜껑을 덮어서 조심스럽게 간수해 둔다.
1년, 이태, 때로는 3년까지 그냥 내버려둔다. 계절이 바뀌고 추위, 더위가 여러 차례 순환한다. 그 동안에 상처 났던 바둑판은 제 힘으로 제 상처를 고쳐서 본디대로 유착(癒着)해 버리고, 균열진 자리에 머리카락 같은 희미한 흔적만이 남는다. 비자의 생명은 유연성이란 특질에 있다. 한 번 균열이 생겼다가 제 힘으로 도로 유착·결합했다는 것은 그 유연성이란 특질을 실제로 증명해 보인, 이를테면 졸업 증서이다. 하마터면 목침감이 될 뻔했던 것이, 그 치명적인 시련을 이겨내면 되레 한 급(級)이 올라 특급품이 되어 버린다. 재미가 깨를 볶는 이야기다.
더 부연할 필요도 없거니와, 나는 이것을 인생의 과실(過失)과 결부시켜서 생각해 본다. 언제나 어디서나 과실을 범할 수 있다는 가능성, 그 가능성을 매양 꽁무니에 달고 다니는 것이, 그것이 인간이다. 과실에 대해서 관대해야 할 까닭이 없다. 과실은 예찬(禮讚)하거나 장려할 것이 못 된다. 그러나 어느 누구가 '나는 절대로 과실을 범치 않는다'고 양언(揚言)할 것이냐? 공인된 어느 인격, 어떤 학식, 지위에서도 그것을 보장할 근거는 찾아 내지 못한다.
작품 개관
갈래 : 수필
성격 : 유추적. 교훈적
표현 : 사실과 생각을 적절히 섞어서 독자의 이해를 도움
구성 : 기-서-결의 3단 구성
제재 : 삶에 대한 이해와 애정
주제 : 유연성이 있는 삶
출전 : <건망허망(健忘虛妄)>(1952)
가장 좋은 '특급품'으로 치는 바둑판은 흠이 있는 것이라는 데서 인생의 의미를 생각한 것이 이 글의 내용이다. 따라서, 바둑판과 인생이 서로 조응(照應)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대상을 바라보되 대상 자체의 실상이나 특성만을 보는 대신, 대상에 자신을 비추어 봄으로써 그 의미를 파악하는 방식의 글은 앞에 나온 '주옹설'에서 이미 보았다. 문학이 가치 있는 체험의 형상화라는 점에 비추어 본다면, 바둑판이 곧 가치 있는 체험으로 형상화된 것이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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