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리 /김경주
모를 심어가듯 구멍마다 숨을 심는다 갈라진 논길을 더듬는 단비 같은 입술로 대궁 속, 소리의 가뭄을 교란시킨다
헛김만 가득한 어둠속에 한 모 한 모 맑은 숨의 뿌리만을 묶어 심고 안창 깊은 곳 오래 전 다진 울음을 퇴비로 깔아준다
소리의 피를 빨아먹던 거머리들이 녹아나기 시작하고 서서히 속내 오므리고 쓰러졌던 모종, 소리의 탯줄들이
풀리는 것이다 더운 바람만 요란했던 내부 소리의 자궁 어디쯤에서 생쌀만한 슬픔들은 익어가는걸까 퍽퍽 뜨거운 눈물을 뱉어내며 태어나는 알몸의 벼들 바람의 입술을 스치고 고랑밖으로 쏟아질때까지 쏟아질때까지
빵구집 /김영탁
빵구집이 있네
무엇이든지 구멍나면 때워주는 그집
홀아비 박씨 단 하나 못 때우는게 있다는
그 흔한 처녀는 그만 두고
벙어리 과부 하나 못 때우는
그 빵구집
뻘밭/ 함민복
부드러움속에 집들이 참 많기도 하지
집들이 다 구멍이네
구멍에서 태어난 물은
모여 만든 집들도 다 구멍이네
딱딱한 모시조개 구멍 옆 게 구멍 낙지 구멍
갯지렁이 구멍 그 옆에도 또 구멍구멍구멍
딱딱한 놈들도 부드러운 놈들도
제 몸보다 높은곳에 집을 지은 놈 하나 없네
옹이가 있던 자리 / 이윤훈
울타리 한 켠 낡은 잿빛 나무 판자에서
옹이하나 아무도 모르게 빠져나가고
아이가 물끄러미 밖을 내다본다
그 구멍에서 파꽃이 피었다 지고
분꽃이 열렸다 닫힌다
쪼그리고 앉아 늙은 땜쟁이가
때워도 새는 얕은 냄비 솥단지를 손질하고
겨울의 궤도에 든 뻥튀기가
등이 시린 이들 사이로 행성처럼 돈다
꿈이 부플기를 기다리며
코로 쭉 숨을 들이키는 이들
홀쭉한 자신의 위장을 닮은 자루를 들고 서 있다
이승의 끝 모서리에 이를 때마다 나는
아이의 그 크고 슬픈 눈과 마주한다
나른 아픈 기억이 빠져나간 그 구멍으로
저 켠 길이 굽어드는곳까지 내다본다
누가 잠자리에 들듯 목관에 들어가 눕는다
뚜껑이 닫히고 어둠이 쿵쿵 못질하는 소리
문득 옹이 하나 내 가슴에서 빠져나가고
세상 한 곳이 환히 보인다
소리의 그늘속으로 / 이화은
중이
죽은 대추나무 방망이 두들기는 소리나
딱따구리가
오동나무 쪼아대는 소리가 한데 어우러져
지난 봄 한철이 쩡쩡했다는데
중이 목탁치는 일이나
딱따구리가 구멍을 파는 일이나
다 제 본업 일 터
중이나 딱따구리나
생업에 충실했던 노동의 한마당이었겠다
절집의 곳간이야 내 알 바 아니지만
울 엄니처럼
가슴 한 복판에 뻥! 구멍을 안고도
주렁주렁
오동나무의 자식농사는
올해도 대풍이니
큰 소리 지나간 자리에 깃든 고요는
또 얼마나 깊을까
슬그머니 가을 귀를 미리 당겨
소리의 그늘 속으로 미리 한발을
밀어넣네
꽃병 / 마경덕
한입에 우겨 넣는 붉은 목 한 다발 부르르 꽃잎이 떨린다
잘린 발목에서 쏟아지는 비린 수액, 입안 가득 핏물이 고인다
소리없이 생피를 들이크는 저 집요함, 허기진 구멍으로
한아름 허무를 받아먹는 식욕과 배설뿐이 캄캄한
구멍은 입이고 항문이다
시한부 목숨들 나, 나 얼마나 살 수 있지? 물컹물컹
썩어가는 발목을 담그고
일제히 폭소를 터트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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