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금항아리/읽은 시

절벽을 건너는 붉은 꽃 외 / 김선우

뿌리기픈나무 2013. 5. 7. 06:18

절벽을 건너는 붉은 꽃

 

김 선 우

 

구름상여 지나간다

하늘은 겹겹절벽

구음처럼 자란

늙은 진달래 나무

절벽끝으로 저를 밀어낸다

누군가 저 여자 건져야 한다

절개한 뱃속처럼 내장이 환히 드러난

저 발화

진달래 꽃잎들

일제히 활짝 열리고

낭떠러지기가

붉고 비른 꽃속으로 들어간다

생리혈 가장 붉은 둘째날

허공을 디디고 선 내 몸의 벼랑으로

진달래 나무가 건너온다

아가야, 달래다오

절벽끝으로 저를 밀고가

절벽을 받아 안는 저

늙은 여자의 말을

 

다래사리

 

부처님 진신치아사리를 친견한 날

이천오백년 전의 이빨이

유리장 안쪽의 허방을 씹고 있었네

무슨 말씀인가 물으시는 듯하여

가까이 다가갔지만 어금니의 기억을 가진

잘 닦여진 이빨 몇낱이었을뿐

돌아나오는 한 겨울 길섶을 지나다

차갑게 언 다래나무 덩굴에 손등을 긁혔네

곱사등이 나무덩굴이 매달고 있던

쪼글쪼글한 다래 열매 몇낱

내 허방을 때리며 뚝, 떨어졌는데

이상도 해라

잦은 폭설에 짱짱하게 얼며 풀리며

눈발속에 뜨거워진 열매 몇 낱이

쪼글거리는 등신불 같았네

제 몸에서 꺼낸 기름으로 다비를 마치고

사리 몇과를 업어 모신 겨울나무 덩굴이

내 손을 붙잡았네

허방이라면

허방속에서 익어가야 하지 않겠느냐

한겨울 얼음꽃 지핀 굽은 나무 등위에서

설산이 쩌렁쩌렁 하도록 나를 때리는

다래사리 몇 낱

 

무서운 식사

 

뼈가 살을 감추고 있다

내 몸이 그토록 숨기고 싶어한 뼈를

터억- 드러내 놓고 벌렁 누운게

자르고 벌리고 으적으적 씹어 뱉어도

찌르고 후비며 살을 다 파먹어도

침묵- 벌렁 드러누운 채

결국 다시 뼈만 남았다

접시 가득 짓이겨진 붉은뼈만

처음보다 더 수북하게 남는 식사

 

백설기

 

윗집 앵두나무 아래에서 우리집 지나 꽤나무 밑까지 두둘겨 맞으며

그 애의 엄마가 쫒겨 내려오는 날이면 불콰해진 얼굴로 그 애의

아버지 어디론가 또 사라지고 한달포 평화롭고 서럽게

앵다나무 잎새 간질이는 달이 뜨곤 하였네

꽤나무 밑에 주저 앉아 울던 그 애의 엄마가 피터진 입가를

혀로 쓱 훔치며 일어설 때면 확 지펴올린 아궁이 속 삭정이들

처럼 꽤나무 밑둥치가 와글와글 뜨거워지곤 했네

그날은 우리집 안택날이어서 팥시루떡과 백설기 찌는 냄새에

봉당의 물그릇처럼 오목해진 날이었네

어스름녘 백설기 나눠 담은 접시를 동네에 돌리고 마지막으로

그 애네 집으로 올라갔을 때 마당과 앵두나무를 타고

내린 달빛이 고요히 흙을 적시고 두꺼운 나무문 조금 열린

부엌에서 간간히 물소리 차오르고 있었네

아궁이 가마솥 수증기가 조금씩 피어오르고 등 돌려

앉은 젊은 엄마의 하얗게 벗은 등에 뜨거운

수건을 대어주는 그 애의 작은 손이 보였네

그 애네 집에 아무도 없어 백설기를 전할수 없었노라고

엄마에게 말하고, 김 오르는 희디 흰 네모난 것을

미어지게 먹은 나는 급체를 앓았네. 바늘로 딴 하얀

손가락 끝에서 스며나온 자줏빛 핏방울이 무서웠네

시루하나 가득 김구멍마다 숭숭 숨을 뱉던 백설기

희고 네모난 그 속내엔 아내의 머리채를 잡아채는 시

끄러운 한낮이 있을것 같고

고깃배가 돌아오는 달포마다 온 동네가 고등어 등처럼

퍼릇퍼릇해지는 우울한 축제가 있을것 같고

또 뭔가 시루하나 가득 뜨겁게 쪄 내리던

붉은상처 자국이 있을것 같은

가족에게 백설기 한조각씩 돌아가면 시루는 이제 뜨거운 숨구명

하나 둘 닫고 밤별들의 난망함 속으로 들어가네

우물속 물바가지가 밤새 우물벽을 치닫는 소리

가지꽃 보라색 슬픈 낯빛이 희디 흰 재처럼 식어가고

아린 잎사귀 뒤에 숨어 어린 꽤들이 서둘러 익어갔네

 

감자먹는 사람들

 

어느 집 담장을 넘어 달겨드는

이것은,

치명적인 냄새

 

식은 감자알 갉작거리며 평상에 엎드려 산수숙제를 하던

엄마 내 친구들은 내가 감자가 좋아서 감자밥 도시락만

먹는 줄 알아. 열 한 식구 때꺼리를 감자없이 무슨 수로

밥을 해대냐고, 귀 밝은 할아버지는 땅밑에서 감자알 크는 소리

들린다고 흐뭇해 하셨지만 엄마 난, 땅속에서

자라는것들이 무서운데 뿌리끝에 댕글댕글한 어지럼증을 매달고

식구들이 밥상머리를 지킨다 하나 둘 숟가락

내려 놓을 때까지 엄마 밥주발엔 숟가락 꽂히지 않는다

어릴적 질리도록 먹은 건 싫어하게 된다더니 감자 삶는 냄새

이것은 치명적인 그리움

꽃은 꽃대로 놓아두고 저는 땅밑으로만 궁그는

꽃진 자리엔느 얼씬도 하지 않는

열한개의 구덩이를 가진 늙은 애기집

 

도화아래 잠들다

 

동쪽 바다 가는 길 도화 만발했길래 과수원에 들어

색을 탐했네 온 마음 모아 색을 쓰는 도화

어여쁘니 요절을 꿈꾸던 내 청춘이 갔음을 아네

가담하지 않아도 무거워지는 죄가 있다는 것은

얼마나 온당한가. 이 봄에도 이 별엔 분분한 포화

바람에 실려 송화처럼 진창을 떠다니고

나는 바다로 가는 길을 물으며 기을 잃고 싶었으나

절정을 향한 꽃들의 노동 이토록 무욕한 꽃의 투쟁이

안으로 닫아 건 내 상처를 짓무르게 하였네

전 생애를 걸고 끝끝내, 아름다움을 욕망한

늙은 복숭아 나무 기어이 피워낸 몇 낱 도화 아래

묘혈을 파고 눕네 사모하던 이의 말씀을

단 한번 대면하기 위해

일생토록 나무없는 사막에 물 뿌린이도 있었으니

내 온몸의 구덩이로 떨어지는 꽃잎 받으며

그대여, 내 상처는 아무래도 덧나야겠네

덧나서 물큰하게 흐르는 향기

아직 그리워할것이 남아 있음을 증거해야겠네

가담하지 않아도 무거워지는

죄를 무릅써야겠네 . 아주, 오래도록

그대와 살고 싶은 뜻밖의 봄날

흡혈하듯, 그대의 색을 탐해야겠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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