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벽을 건너는 붉은 꽃
김 선 우
구름상여 지나간다
하늘은 겹겹절벽
구음처럼 자란
늙은 진달래 나무
절벽끝으로 저를 밀어낸다
누군가 저 여자 건져야 한다
절개한 뱃속처럼 내장이 환히 드러난
저 발화
진달래 꽃잎들
일제히 활짝 열리고
낭떠러지기가
붉고 비른 꽃속으로 들어간다
생리혈 가장 붉은 둘째날
허공을 디디고 선 내 몸의 벼랑으로
진달래 나무가 건너온다
아가야, 달래다오
절벽끝으로 저를 밀고가
절벽을 받아 안는 저
늙은 여자의 말을
다래사리
부처님 진신치아사리를 친견한 날
이천오백년 전의 이빨이
유리장 안쪽의 허방을 씹고 있었네
무슨 말씀인가 물으시는 듯하여
가까이 다가갔지만 어금니의 기억을 가진
잘 닦여진 이빨 몇낱이었을뿐
돌아나오는 한 겨울 길섶을 지나다
차갑게 언 다래나무 덩굴에 손등을 긁혔네
곱사등이 나무덩굴이 매달고 있던
쪼글쪼글한 다래 열매 몇낱
내 허방을 때리며 뚝, 떨어졌는데
이상도 해라
잦은 폭설에 짱짱하게 얼며 풀리며
눈발속에 뜨거워진 열매 몇 낱이
쪼글거리는 등신불 같았네
제 몸에서 꺼낸 기름으로 다비를 마치고
사리 몇과를 업어 모신 겨울나무 덩굴이
내 손을 붙잡았네
허방이라면
허방속에서 익어가야 하지 않겠느냐
한겨울 얼음꽃 지핀 굽은 나무 등위에서
설산이 쩌렁쩌렁 하도록 나를 때리는
다래사리 몇 낱
무서운 식사
뼈가 살을 감추고 있다
내 몸이 그토록 숨기고 싶어한 뼈를
터억- 드러내 놓고 벌렁 누운게
자르고 벌리고 으적으적 씹어 뱉어도
찌르고 후비며 살을 다 파먹어도
침묵- 벌렁 드러누운 채
결국 다시 뼈만 남았다
접시 가득 짓이겨진 붉은뼈만
처음보다 더 수북하게 남는 식사
백설기
윗집 앵두나무 아래에서 우리집 지나 꽤나무 밑까지 두둘겨 맞으며
그 애의 엄마가 쫒겨 내려오는 날이면 불콰해진 얼굴로 그 애의
아버지 어디론가 또 사라지고 한달포 평화롭고 서럽게
앵다나무 잎새 간질이는 달이 뜨곤 하였네
꽤나무 밑에 주저 앉아 울던 그 애의 엄마가 피터진 입가를
혀로 쓱 훔치며 일어설 때면 확 지펴올린 아궁이 속 삭정이들
처럼 꽤나무 밑둥치가 와글와글 뜨거워지곤 했네
그날은 우리집 안택날이어서 팥시루떡과 백설기 찌는 냄새에
봉당의 물그릇처럼 오목해진 날이었네
어스름녘 백설기 나눠 담은 접시를 동네에 돌리고 마지막으로
그 애네 집으로 올라갔을 때 마당과 앵두나무를 타고
내린 달빛이 고요히 흙을 적시고 두꺼운 나무문 조금 열린
부엌에서 간간히 물소리 차오르고 있었네
아궁이 가마솥 수증기가 조금씩 피어오르고 등 돌려
앉은 젊은 엄마의 하얗게 벗은 등에 뜨거운
수건을 대어주는 그 애의 작은 손이 보였네
그 애네 집에 아무도 없어 백설기를 전할수 없었노라고
엄마에게 말하고, 김 오르는 희디 흰 네모난 것을
미어지게 먹은 나는 급체를 앓았네. 바늘로 딴 하얀
손가락 끝에서 스며나온 자줏빛 핏방울이 무서웠네
시루하나 가득 김구멍마다 숭숭 숨을 뱉던 백설기
희고 네모난 그 속내엔 아내의 머리채를 잡아채는 시
끄러운 한낮이 있을것 같고
고깃배가 돌아오는 달포마다 온 동네가 고등어 등처럼
퍼릇퍼릇해지는 우울한 축제가 있을것 같고
또 뭔가 시루하나 가득 뜨겁게 쪄 내리던
붉은상처 자국이 있을것 같은
가족에게 백설기 한조각씩 돌아가면 시루는 이제 뜨거운 숨구명
하나 둘 닫고 밤별들의 난망함 속으로 들어가네
우물속 물바가지가 밤새 우물벽을 치닫는 소리
가지꽃 보라색 슬픈 낯빛이 희디 흰 재처럼 식어가고
아린 잎사귀 뒤에 숨어 어린 꽤들이 서둘러 익어갔네
감자먹는 사람들
어느 집 담장을 넘어 달겨드는
이것은,
치명적인 냄새
식은 감자알 갉작거리며 평상에 엎드려 산수숙제를 하던
엄마 내 친구들은 내가 감자가 좋아서 감자밥 도시락만
먹는 줄 알아. 열 한 식구 때꺼리를 감자없이 무슨 수로
밥을 해대냐고, 귀 밝은 할아버지는 땅밑에서 감자알 크는 소리
들린다고 흐뭇해 하셨지만 엄마 난, 땅속에서
자라는것들이 무서운데 뿌리끝에 댕글댕글한 어지럼증을 매달고
식구들이 밥상머리를 지킨다 하나 둘 숟가락
내려 놓을 때까지 엄마 밥주발엔 숟가락 꽂히지 않는다
어릴적 질리도록 먹은 건 싫어하게 된다더니 감자 삶는 냄새
이것은 치명적인 그리움
꽃은 꽃대로 놓아두고 저는 땅밑으로만 궁그는
꽃진 자리엔느 얼씬도 하지 않는
열한개의 구덩이를 가진 늙은 애기집
도화아래 잠들다
동쪽 바다 가는 길 도화 만발했길래 과수원에 들어
색을 탐했네 온 마음 모아 색을 쓰는 도화
어여쁘니 요절을 꿈꾸던 내 청춘이 갔음을 아네
가담하지 않아도 무거워지는 죄가 있다는 것은
얼마나 온당한가. 이 봄에도 이 별엔 분분한 포화
바람에 실려 송화처럼 진창을 떠다니고
나는 바다로 가는 길을 물으며 기을 잃고 싶었으나
절정을 향한 꽃들의 노동 이토록 무욕한 꽃의 투쟁이
안으로 닫아 건 내 상처를 짓무르게 하였네
전 생애를 걸고 끝끝내, 아름다움을 욕망한
늙은 복숭아 나무 기어이 피워낸 몇 낱 도화 아래
묘혈을 파고 눕네 사모하던 이의 말씀을
단 한번 대면하기 위해
일생토록 나무없는 사막에 물 뿌린이도 있었으니
내 온몸의 구덩이로 떨어지는 꽃잎 받으며
그대여, 내 상처는 아무래도 덧나야겠네
덧나서 물큰하게 흐르는 향기
아직 그리워할것이 남아 있음을 증거해야겠네
가담하지 않아도 무거워지는
죄를 무릅써야겠네 . 아주, 오래도록
그대와 살고 싶은 뜻밖의 봄날
흡혈하듯, 그대의 색을 탐해야겠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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