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금항아리/읽은 시

어머니 날 낳으시고 /정 일 근

뿌리기픈나무 2013. 5. 5. 06:44

어머니 날 낳으시고

 

정 일 근

 

 

오줌 마려워 잠깼는데 아버지 어머니 열심히 사랑나누고 계신다 나는 큰 죄 지은것처럼

피가 끓어 벽으로 돌아누워 쿨쿨 잠든 척 한다. 태어나 나의 첫 거짓말은 깊이 잠든것처럼

들숨날숨 고른 숨소리를 유지하는 것, 하지만 아줌 마려워 빳빳해진 일곱 살 미운 내 고추

감출 수 없다

어머니 내가 잠깬 것 처음부터 알고 계신다

사랑이 끝나고 밤꽃 내음 나는 어머니 내 고추 꺼내 요강에 오줌 누인다

나는 귀찮은 듯 잠투정을 부린다.

태어나 나의 첫 연기는 잠자다 깨어난 것처럼 잠투정을 부리는 것 하지만 어머니 다 아신다

어머니 몸에서 내 몸 만들어져 어머니 내몸 부엌살림처럼 낱낱이 다 알고 계신다

 

사과야 미안하다

 

사과 과수원을 하는 착한 친구가 있다 사과 꽃 속에서

사과가 나오고 사솨속에서 더운밥이 나온다며 나무야 고맙다 사과나무야 고맙다

사과나무 그루 그루마다 꼬박꼬박 절하며 과수원을 돌던 그 친구를 본 적 있다 사과꽃이 새치름하게 눈 뜨던

저녁이었다 그날 나는 천년에 한번씩만 사람에게 핀다는 하늘의 사과꽃 향기를 맡았다

 

눈 내리는 밤에 친구는 사과를 깍는다. 툭, 칼등으로 쳐서 사과를 혼절 시킨 뒤 그 뒤에 친구는

사과를 깍는다 붉은 사과에 차가운 칼날이 닿기전에 영혼을 울리는 저 따뜻한 생명의 만트라,

사과야 미안하다 사과야 미안하다 친구가 제 살과 같은 사과를 조심조심 깍는 정갈한 밤

하늘에 사과꽃 같은 눈꽃이 피고 온 세상에 사과향기 가득하다

 

흑백다방

 

오래 된 시집을 읽다 누군가 그어준 붉은 밑줄을 만나

그대도 함께 가슴 뜨거워진다면

흑백다방 스무살 내 상처의 비망록에 밑줄 그어진

그곳도 그러하리

베토벤 교향곡 5번 c단조를 들을 때마다

4악장이 끝나기도 전에

쿵쿵쿵 쿵 쿵. 운명이 문을 두드리며 찾아와

수갑을 찾고 유폐 될것 같았던

불온한 스무살을 나는 살고 있었으니

그리하여 알렉산드리아 항구로 가는 밀항선을 타거나

희망봉을 돌아가는 배의 삼등 갑판원을 꿈꾸었던

날들이 내게 있었으니

진해의 모든 길들이 모여들고 모여 들어서

사방팔방으로 흩어지는 중원 로터리에서

갈길을 잃은 뒤축 구겨진 신발을 등대처럼 받아주던

오늘의 발목을 잡는 어제와

내일을 알 수 없는 오늘의 노출혈을 터트려

내가 숨쉬기 위해 숨어들던 그곳

나는 그곳에서 비로소 시인을 꿈꾸었으니

내 습작의 교과서였던 흑백다방이여

menento nori

세상의 화려한 빛들도 영원하지 않고

살아 잇는것은 모두 사라지느니

영혼의 구릇에 너는 무슨 색깔과 행기를 담으려 하느냐

나를 위무하며 가르쳤으니

그 자리 그 색깔 그 향기로

사진첩의 속의 흑백사진처럼 오래 남아있는

since1955 흑백다방

진해시 대천동 2번지

 

나에게 사랑이란

 

마음에 누군가를 담고 살아가는 것이

사랑인 줄 알았습니다. 사랑하기에

젊은날엔 그대로 하여 마음 아픈것도

사랑의 아픔으로만 알았습니다

이제 그대를 내 마음속에서 떠나 보냅니다

멀리 흘러가는 강물에 아득히 부는 바람에

잘가라 사랑아, 내 마음속에 그대를 놓아 보냅니다

불혹, 마음의 빈자리 하나 만들어 놓고서야

나는 사랑이 무엇인지 아는 나이가 되었나 봅니다

사랑이란 누군가를 가두는 것이 아니라

마음을 비워놓고 기다리는 일이어서

그 빈자리로 찾아올 누군가를 기다리는 일이어서

사람을 기다리는 일이 사랑이라는 것을

이제야 나도 알게 되었나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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